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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토)

가라앉아야 사는(?) 배, 플립!

에이스보… 조회 : 14,721

아카데미상 최다부문 수상기록(11개)을 가진 영화 ‘타이타닉’에서 많은 사람들은 두 주인공이 뱃머리에서 양팔을 벌려 하늘을 날듯 서있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공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몰라도 배가 침몰하는 장면이 가장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커다랗고 화려한 배가 침몰하면서 마지막에는 뱃머리가 완전히 세워져서 있는데,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에 손만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세상에는 참으로 별난 배가 하나 있다. 이 배는 타이타닉의 최후의 비참한 모습을 일부러 연출한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플립’(Flip)이다. 위태롭게 뱃머리만 떠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을 듯한 모습이지만 타이타닉호 같은 비극이 플립에는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기묘한 모습의 플립에 대해 알아보자.


미국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에서 1963년에 건조한 해양실험장비 플립은 평상시에는 다른 배처럼 옆으로 누워서 떠있지만, 해양관측을 할 때가 되면 말 그대로 ‘flip’(flip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돌리다’는 뜻)해서 똑바로 서게 된다. 그러면 평상시에 정박해 있을 때 플립은 어떤 모습일까? 아래 가운데 사진에서 기다란 야구방망이처럼 보이는 것이 플립의 평상시 모습이다.



무려 108m에 달하는 야구방망이다! 야구방망이와 비교하면 손잡이에 해당하는 앞부분 약10m가 배의 형태를 하고 있고 이 구역에 모든 생활공간과 작업공간이 꾸며져 있다. 그리고 야구방망이처럼 생긴 나머지 100m는 텅 빈 공간이다. 눕혀진 야구방망이처럼 수평으로 떠 있는 플립은 해양관측을 하고자 할 때 텅 빈 공간에 물을 채워 넣는다. 방망이 끝부터 조금씩 물을 채워지면서 조금씩 기울어지고 방망이는 끝부터 가라앉게 된다. 그리고 28분 정도 물을 채우면 90m이상이 물에 잠겨 플립은 완전히 수직으로 서게 된다.






플립은 잠시만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최대 16명의 인원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플립에 거주하면서 며칠 동안 연구 활동은 물론이고 먹고 자는 모든 생활을 해야 한다. 플립이야 물을 채워서 수직으로 세웠지만 안에 있는 가구들은 어떻게 될까? 플립을 세울 때 우루루 흘러내리지 않을까?


물론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플립을 만든 똑똑한 과학자들은 이에 대한 방안을 이미 다 마련했고 덕분에 플립은 겉모습뿐 아니라 그 속도 아주 재미있는 배가 됐다. 플립에 설치된 대부분의 가구들은 ‘돌려서’ 사용할 수 있다. 플립이 돌면 벽은 천장이나 바닥이 되고 벽에 설치된 문은 천장이나 바닥에 있는 연결 구멍이 된다. 책상이나 침대 등은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돼 있고 한편으로는 회전을 해서 플립이 어떤 자세든 사용할 수 있다. 싱크대나 식탁 테이블 같은 것은 사진의 오른쪽처럼 아예 두 개를 설치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굳이 플립을 수직으로 세우려고 했을까? 해양실험장비인 플립은 수중음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개발했다. 수중음향학은 물속에서의 음파 이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학문·산업·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물속에서는 빛보다 소리가 멀리 전파되기 때문에 해저탐사나 잠수함의 운항 등에는 빛이 아닌 소리를 이용한다. 어두컴컴한 깊은 바다 속의 지형을 파악하고 숨어있는 해저광물을 개발하고 물고기 떼를 찾을 때도 소리를 이용한다.


잠수함에서는 “뚜~뚜~뚜~”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장님이 지팡이로 여기저기 두들기듯 잠수함이 소리를 내 주변 지형을 탐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속에서는 소리가 똑바로 직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의 온도, 염분 등에 의해 휘어진다. 때문에 정밀한 관측을 위해서 최대한 조용한 환경이 필요했다.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배에서 나는 엔진소리와 흔들림도 정밀한 관측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개발한 것이 바로 플립이다.


일반 배는 수평으로 누워있기 때문에 파도가 출렁거림에 따라 배 앞부분과 배 뒷부분의 높이가 꽤 차이날 수 있다. 파도가 높은 곳은 부력이 더 커서 배가 위로 올라가는 힘을 받고 파도가 낮은 부분은 부력이 더 작아서 배가 아래로 힘을 받는다. 따라서 파도가 출렁거릴 때마다 배도 같이 움직이고 출렁거리게 된다. 이에 반해 플립은 수면이 닿는 곳의 면적이 작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파도의 수면이 거의 일정하게 바뀌게 되어 파도가 출렁거려도 그 영향을 적게 받는다. 이는 낚시찌를 곱고 가늘게 만들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태까지 가라앉아야 사는(?) 신기한 배, 플립을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거짓말 하나를 계속 하고 있다. 플립의 마지막 비밀은 '사실 플립은 배가 아니다‘는 점이다. 플립이 조금 못생기기는 했지만 배가 아닐 이유는 없지 않나? 앞부분도 보통 배처럼 생겼고, 물에 잘만 떠다니는데 왜 배가 아닐까?


우리가 배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특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물위에 떠 있는 능력인 ‘부양성’을 갖춰야 하고, 사람이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능력인 ‘적재성’을 갖춰야 하며 마지막으로 원하는 곳으로 스스로 갈 수 있는 ‘이동성’을 갖춰야 한다. 플립은 부양성과 적재성은 갖췄지만 불행히도 엔진이나 프로펠러가 없어서 혼자서 움직이지 못한다. 즉 이동성이 없어 플립은 배로 불리지 못한다. 실제로 플립을 실험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진짜 배가 밧줄로 연결해서 끌고 간다.


해양 관측을 위해 108m나 되는 이 못생긴 야구방망이를 만든다는 자체가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의아한 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1963년부터 이런 무모한(?) 관측 장비를 제작할 만큼 자연과학과 공학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연구자로서 그런 전폭적인 지원이 부러울 뿐이다. (글 : 유병용, ‘과학으로 만드는 배’ 저자)


Tip

플립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원한다면 ‘Flipping for Science’를 방문해 보기 바란다.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과학도를 위해 플립 모델을 만드는 실험도 소개돼 있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19629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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